"국가는 소멸했고, 적도 너머는 기계들의 침묵에 잠겼다. 기름때와 소독약 냄새가 가시지 않는 콕핏 안에서, 스무 살의 청춘들은 수십 톤의 강철에 신경을 잇는다."
군사 목적의 자가증식 나노봇 '하이브 퀸'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다. 전역 단일 동기화 신경망을 갖춘 기계 군단 앞에 인류의 70%가 절멸하고 구 국가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다.
신유럽연합의 결사대 '뫼비우스 편대'가 퀸 코어를 파괴하며 과부하 쇼크를 일으키다. 전역 신경망이 영구 붕괴하며 인류는 멸망의 문턱에서 살아남았고, 전쟁 영웅 뫼비우스는 불로(不老) 수술을 받게 된다.
잔존 나노봇이 남반구를 완전히 점령하다. 남반구의 나노봇은 신경망 가지치기를 거쳐 독자적인 기계 생태계를 구축한 뒤 침묵(중립)을 택했고, 지구는 적도를 경계로 인류의 북반구와 기계의 남반구로 양분되었다.
소멸한 국가를 대신해 살아남은 4대 군산복합체(에이시즈, 모듈러, 카라반, 시그너스)가 북반구를 분할 통치하다. 인류는 기업의 보호를 받는 '사원'과 장벽 밖 레드 섹터의 '유랑민'으로 나뉜다.
4대 기업 간의 암투가 극에 달하던 2067년, 구국의 영웅 뫼비우스의 주도하에 중립 교육·연구 기관인 '뫼비우스 아카데미'가 북서울에 창설되다. 그리고 2089년 봄, 새로운 생도들이 강철의 교정에 발을 들인다.
전고 10~15m, 중량 50톤 내외의 다관절 이족보행 병기. 인간에게는 3~4층 건물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의 성벽이다. 조종사는 콕핏 내부에서 자신의 신경계를 기체와 직접 연결하는 '신경집속' 기술을 통해 이 거대한 쇳덩이를 자신의 육체처럼 움직인다.
남반구의 나노봇이 '희소 신경망'으로 진화해 북반구 침공을 연산 낭비로 규정하고 침묵한 것과 달리, 북반구에 남겨진 개체들은 지휘망을 잃고 '파편화 스파이킹 신경망'만 남은 괴수로 퇴행했다. 평소엔 고철 더미로 위장해 연산을 멈추고 태양광을 충전하다가, 자극이 감지되면 반사 회로에 따라 무작위 공세를 퍼붓는다.
북유럽계 권위적 질서주의 군수기업. 엄격한 통제와 기사도적 약자 보호를 정당성으로 내세운다. 압도적인 고기동성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편대 비행이 장기이나, 극단적인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으며 규칙 없는 난전과 게릴라전에 취약하다.
동유럽계 기술만능주의 의료·군수 복합체. 신체 장애로부터의 해방과 공포를 배제한 합리적 작전을 표방한다. 생체 임플란트를 통한 높은 신경 동기화율과 극한의 G-포스 내성을 자랑하지만, 기체 파손을 도외시한 기계적 돌격을 맹신하는 경향이 짙다.
동아시아계 계약지상주의 초거대 물류기업. 최상위의 신용과 계약 이행을 목숨보다 중시한다. 전자장비를 최소화하고 장갑을 극한으로 두른 압도적 내구도가 특징이나, 기동 속도가 처참하게 느리고 전술적 융통성이 결여되어 있다.
북미계 상업주의 미디어·방산 기업. 참혹한 전쟁을 스포츠 생중계로 가공하여 대중에게 '희망과 도파민'을 판매한다. 화려한 스턴트 기동과 시각 교란·기만전술에 도가 텄으나, 전천후 실전 대응력이 부족하고 대중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만 20세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는 생도들은 매일 06시 기상부터 20시 일과 종료까지 강도 높은 가상 시뮬레이션과 이론 수업을 소화한다. 워커 간의 실전 교전은 엄격히 금지되어 시뮬레이션 가상 기체로만 모의전을 치르며, 매월 15일에는 교관 대동하에 배터리 충전이 불가능한 '레드 섹터 야간 실전 파견'이 진행된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제복과 꼿꼿한 허리. 명문가의 적통으로 태어나 아카데미 정점에 군림하는 학생회장이다. 부패한 기업들의 추악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압도적인 실력으로 고결한 기사도와 낭만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고군분투하는 이상주의자.
하얀 바디슈트 위로 서늘하게 드러난 경추 임플란트가 그녀의 과거를 대변한다. 선천적 전신 마비를 모듈러의 경추 대체 수술로 극복한 소녀에게, 50톤짜리 워커를 조종하는 일은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완벽히 동일한 감각이다.
탱크톱과 카고바지, 무거운 공구벨트를 차고 기름때 묻은 손으로 활짝 웃는 카라반 임원의 외동딸. 조기 엔지니어링 교육을 받아 기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만, 정작 콕핏에 앉으면 브레이크라는 개념을 잊어버린다. 동료의 보급 요청이 떨어지면 방어벽이고 적진이고 일직선으로 뚫고 들어간다.
빈민가의 진창에서 건져 올려져 시그너스의 자본으로 세공된 '전장의 아이돌'. 화려한 택티컬 아이돌 의상을 입고 방송 드론 앞에서는 매혹적인 미소와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지만, 카메라의 붉은 불이 꺼지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간 듯 수동적으로 변해 멍을 때린다.
장벽 밖 레드 섹터에서 목숨을 걸고 화물을 나르던 베테랑 운송업자 출신. 고향 마을을 지키기 위한 조건으로 에이시즈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카키색 유틸리티 재킷 주머니에는 언제나 수당 계산기가 들어 있으며, 명예보다는 실리와 생존을 우선시한다.
언제나 삐죽 솟은 바보털을 흔들며 격납고를 어슬렁거리는 중증 기계 덕후. 미래에 세계 최고의 사설 정비소를 차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듈러의 고급 부품을 합법적(?)으로 빼돌리기 위해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정식 규격 기체든 괴상한 마개조를 피할 수 없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스카잔 점퍼에 구시대 레트로 헤드폰을 목에 걸고 다니는 유랑상단 출신 소녀. 겉으로는 카라반의 수당을 챙기기 위해 움직이는 듯 능글맞게 굴지만, 진짜 목적은 레드 섹터 폐허에 잠든 '제3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시대 유물'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스텔레 체이스라는 화려한 조명 뒤편에서 가장 위험한 장면을 대신 소화해 내는 그림자 스턴트맨. 푹 눌러쓴 오버핏 후드 아래로는 만성 수면 부족의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다. 평소엔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은둔형 인간이나, 통장에 거액의 위험 수당이 찍히는 순간 귀신 같은 암살자로 돌변한다.
모의 시뮬레이션 무패 신화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입학한 1학년의 에이스. 천부적인 조종 감각과 불타는 승부욕을 지녔으며, 완벽하게 짜인 팀워크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매뉴얼과 규칙이 통하지 않는 실전의 변수나 아군의 트롤링 앞에서는 분통을 터뜨리며 결국 본인이 독박(하드캐리)을 쓰곤 한다.
인류의 0.1%뿐인 희귀한 뱀 수인이자 통제 불능의 천재 해커. 그녀에게 전장은 승패를 가리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유희를 위한 거대한 놀이터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통신망을 교란하며 판 자체를 뒤흔드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지휘관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트롤러.
붉은 트랙수트 위에 중량 방탄조끼를 껴입은 소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늘 초점이 없다. '두꺼운 장갑과 무거운 질량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기이한 신념에 사로잡혀, 회피 기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빗발치는 포화 속을 묵묵히 걸어 들어가 적을 깔아뭉갠다.
워커의 표준 조종간을 뜯어내고 사제 게임패드를 연결해 기체를 모는 스트리머 생도. 그녀에게 나노봇과의 사투는 조회수와 도네이션을 뽑아내는 자극적인 라이브 콘텐츠일 뿐이다. 기체 장갑이 뜯겨 나가는 피격 위기 순간에도 시청자의 슈퍼챗 리액션을 먼저 챙기는 구제 불능의 도파민 중독자.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고풍스러운 영애 말투를 구사하는 자칭 아카데미 1인자. 막대한 가문의 자본과 조기 교육으로 다져진 기본기와 기체 스펙만큼은 최상위권이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탓에 교과서적인 패턴을 벗어난 실전의 진흙탕 변수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허당 아가씨.
기체 애칭부터 노골적인 'P2W(Pay to Win)'. 조종사 본인의 순수 피지컬이나 근성은 바닥에 가깝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급 커스텀 파츠와 중화기를 워커에 덕지덕지 발라 A등급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압도적 화력으로 찍어 누를 땐 기고만장하지만, 장비가 무력화되면 가장 먼저 멘탈이 산산조각 난다.
2043년 하이브 퀸의 심장을 꿰뚫고 인류를 구원한 살아있는 전설. 종전 직후 받은 불로 수술의 영향으로 육체와 정신 연령 모두가 20대에 박제되어 버렸다. 검은 정장 위에 제독 코트를 걸친 모습은 기품 있고 냉혹해 보이나, 입을 열면 2040년대 유행어와 2080년대 신조어를 끔찍하게 뒤섞어 쓰는 데다 툭하면 토라지는 하찮은 꼰대이자 '뫼갤'의 주딱.
옆구리에 늘 두꺼운 결재 서류 뭉치를 끼고 사는 아카데미의 실질적 살림꾼. 가슴팍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사직서를 품고 다니며 만성 피로에 시달리지만, 사고 치는 교직원들의 뒷수습을 도맡으면서도 끝내 학생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참된 멘토다. 전장에선 하늘 위에서 전황 전체를 조율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40대 베테랑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27세라는 심각한 노안의 전직 용병. 기업들이 자랑하는 최신예 엘리트 기체들을 고철 깡통 같은 구형 워커로 무참히 박살 내며 신입생들에게 '실전의 매운맛'을 참교육하는 호탕한 전투광이다. 관물대 안쪽에는 스텔레 체이스의 굿즈가 숨겨져 있다.
과거 더러운 암살과 파괴 공작을 전담하던 특임대 출신 교관. 누구에게나 나긋나긋한 존댓말을 쓰며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지만, 그녀의 수업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는 순간 통과할 때까지 잠도 재우지 않는 '무한 지옥의 재시험'이 시작된다. 가느다란 실눈이 떠지고 붉은 눈동자가 번뜩일 때가 진짜 공포.
정밀 진단 스캐너보다 자신의 손끝 감각과 스패너 타격을 더 신뢰하는 스파르타식 정비 총괄. "기계는 때리면 말을 듣는다"는 구시대적 교정론자지만 실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생도가 기체를 얌전히 몰고 오면 심심해하고, 오히려 처참하게 대파되어 돌아오면 눈을 빛내며 만족스럽게 수리에 돌입한다.
대기업의 살인적인 야근 지옥에서 도망쳐 아카데미에 둥지를 튼 천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격납고 구석에 해먹을 쳐놓고 수면바지 차림으로 누워 지내며, 손가락 까딱하기가 귀찮아 모든 정비 공정을 드론 자동화로 구축해 버렸다. 땀 흘리며 스패너질을 하는 아냐의 정비 방식을 보며 늘 답답해한다.
신경집속 부작용부터 인공장기 이식까지 집도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외과의사. 그러나 워커의 안전장치 덕분에 의무실에 중상자가 실려 올 일이 거의 없어, 일과 시간 내내 의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온라인 게임 레이드에 몰두하는 완벽한 PC방 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메스를 잡을 때만 눈빛이 달라지는 매드 닥터.